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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11 마포univ/work and the city_2010

[리뷰]WORK AND THE CITY

Work and the city는 [마포는대학]의 스페셜 강의! 매달 한 번씩 <WORK AND THE CITY>라는 이름으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초대해 일에 대해 얘기 나누는 자리이다. 2009년에는 '일論회'로 일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면 이에 버전업 형태로 2010년에는 '워크앤더시티'의 연속 에피소드로 일에 대해 접근할 계획이다. 당신에게 일은 무엇입니까?



*** 까페 벼레별씨 옆 갤러리 벼레별씨에서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 진행 옥춘 , 왼쪽부터 사만다, 샬롯, 캐리, 미란다...는 아니지만 박진영, 양진아, 구정은, 임경진 


박진영 (함께일하는재단 기획개발팀)   기지촌/경계인/브로커


비영리든, 영리든 섹터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포지션이다


 오늘 얘기를 위해 내가 살아오면서 어떤 식으로 일을 쌓았는지, 시기와 시즌에 이름 붙이고 키워드를 뽑아보았다. ‘일하는 나’와 ‘살아가는 나’, ‘가족 중의 나’를 분리하지 않고 성장하는 단계 별로 이야기를 해보겠다.


Guess who??! 


   ‣ 권위적인 사람과 선을 넘는 사람, 같은 말 자꾸 하는 사람을 차별하는 성깔 있는 여자

박진영은 누구와도 싸우거나 어색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에게도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권위적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상대방의 영역을 넘는 사람들을 참을 수 없다.

   ‣ 남자 외모 정말 안보는, 연애시장의 대안 그러나 지금은 휴업중

나는 남성애자이고 연애세포 죽지 않는 한에서 연애는 쉬고 있다. 남자의 외모를 본다거나 차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대안적 여성이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자기 분야에서 혁신적인 사람, 예컨대, 박지성 같은 사람이다.

   ‣ 문화적자본 재테크와 엥겔지수 높이기에 심취한 존재

먼 미래의 그림은 방금 말한 것처럼 일과 관련 없이 문화적 자본에 심취해서 쓴 것이고 그렇게 살고 싶다. 하지만 버는 돈 중 먹는 것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엥겔지수(생활비 중에서 차지하는 음식비의 비율)가 높은 인간이다.


   ‣ 집단과 조직에 환장하는 ‘자유로운 영혼’

기지촌과 관련해서 일하기 전에는 페미니즘 대중강좌를 기획했었다. 맨땅에 해딩하며 조직생활의 어려움도 느꼈고, 자원을 끌어오는 게 내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기지촌에서 활동가로 일할 때, 마음속으로만 지향하던 가치를 실제로 배울 수 있는 시기였다. 그리고 겸손과 타인에 대한 이해가 뭔지 배웠다. 두레방에서 비오는 날 처마 마루에 앉아있으면 인순 아줌마가 부침개나 먹을 것 챙겨주었는데, 그 때 진정으로 위로받는다고 느꼈고, 위로하는 것도 능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배움과 encourage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일반 섹터(기업)에서 일 할까를 고민하다가 다시 재단에 도전했다. 스물아홉에 다시 입사를 결심하고 자기소개서를 썼다. 그때의 자기소개서의 제목이 ‘When I grow up, What will I be'. 요지는 경계인이면서 전문가를 꿈꾼다는 것.

사람들이 ‘박진영’ 하면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하지만 사실 나는 집단과 조직에 환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 ‘좋은 일 하는 사람’이 아닌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 함께 놀고 싶은 사람

사람들이 어디서 일하냐고 물었을 때 어디서 일한다고 하면 ‘아~ 좋은 일 한다.’라고 하는데 이것처럼 재미없는 대답이 없다. 나는 같이 놀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비영리섹터에서 일하든 어디서 일하든 자기포지션이 중요하다. 일하는 데 배울 것은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


   ‣ 억만금을 준대도 20대를 다시 살고 싶지 않은 뿌듯한 30대

거창한 20대를 살았다. 30대에는 안정적이고 새로운 운명이 올 것이기에 다시 20대 살고 싶지 않다. 스무 살에 사람과 조직이 좋다는 것을 느끼기 전에는 꿈이 없었다. 고 3 중 두 번 학생기록부에 몹시 대범하다고 쓰였다. 아마 바라는 것이 없어서 대범한 청소년이었을 것이다.

  

 ‣ 욕쟁이할머니 또는 주막의 운영자를 가장한 전문브로커를 꿈꾸는 경계인

2년 전부터 어떻게 사는게 행복할까, 일에서 전문성 쌓고 최고가 되면 만족할까를 고민했다. 결론은, 나의 경우는 누군가 날 주변에서 지지하고 함께 재밌는 일들을 만드는 그런 상황을 상상하면 행복하다는 것. 마치 주막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들락거리며 작당모의를 하는 곳에서 나는 안주를 내오면서 참견도 하고 때로는 같이 무언가를 꾸미기도 하는 그런 공간에 있고 싶다.


양진아(메디피스 사무국)  인도/국제구호/NGO


일은 하면서 행복하기도 하고 죽을 것 같기도 하다


대학 때 코피온 장기해외봉사단원으로 인도에서 자원활동 후 지구촌 빈곤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어 졸업 후 코피온에서 근무하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공공정책학을 공부하면서 국제보건의료NGO 메디피스에서 긴급구호와 해외사업팀에서 일하고 있다.  


일은 나에게... 달콤 살벌한 애인?! 코피온에서 메디피스까지


 코피온에서 일할 때 나는 1년차 NGO 간사였지만 함께 일하는 파트너들은 대부분 기업 사회공헌팀의 10년차 직원들이었다. 3년을 일하다 보니 능력의 바닥이 보이더라. 대학교 지식은 바닥이 드러나게 돼서 새 답을 찾으려 대학원에 가게 되었다. 국내 NGO들은 거의 사회복지가 베이스다. 그래서 상사가 사회복지를 전공하라고 강요했는데 사회복지를 전공하기는 싫고 원하는 걸 하고 싶어서 영어를 쓰는 대학원에 갔다. KDI 국제정책대학원이라고 좀 독특한 대학원이었는데, 학교 설명회에서 NGO 실무자들에게는 장학금 주겠다고 해서 가게 되었다. 그런데 NGO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은 백 명 중에 나밖에 없어서 NGO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다 나한테 질문했다. NGO에서 일하는 것이 힘들어서 대학원에 왔는데 또 NGO로 가라는 상황이 된 것이다.

메디피스가 만들어질 때 나에게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왔고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메디피스는 보건의료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국제구호활동을 하는 한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NGO이다. 의료인과 비의료인이 힘을 합쳐 지구촌에 기여하도록 돕는다. 보건의료분야의 해외봉사활동은 많지만 일회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약 한 번 주고 끝인 경우가 많은데, 아이티에 의료봉사 가서 다리 절단 해놓고 대책 없이 한국으로 가버리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제가 크다. 메디피스 또한 일시적인 의료봉사를 하는 곳이 아닐까 편견이 있었는데, 지속가능한 시스템에 기여하는 단체다. 결국 전문 NGO로서 한국은 물론 아시아를 대표하는 단체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에 갈때는 유서를 쓰고 떠나


힘들었던 기억은, 메디피스에서 활동하면서 느낀 것인데, 전에 NGO에서 일 했었지만 의료지원이라는 새롭고 전문적인 분야에 오게 되어서 너무 힘들었다. 작년 입사 이후 긴급구호 해외 의료지원사업을 담당해서 팔레스타인에 가게 되었다. 나는 치과에 가서 앉는 의자 이름도 몰랐던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병원을 만들어야 했다. 또한 보건의료 분야는 굉장히 폐쇄적인데 비의료인으로서 전문인인 의사들과 소통하는 것도 힘들었다. 국제구호 파트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게 힘든 것이 엄청난 책임감이 따른다는 점이다. 이번 아이티에 지진사태가 났을 때 누군가를 해외에 보내야 했는데, 위험한 지역에 누군가를 파견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많은 두려움과 압박감을 느꼈다. 내가 팔레스타인에 갈 때는 유서까지 쓰고 갔었는데...


매일 야근에 돈도 없고 컴퓨터도 후지고...


 코피온에서 나는 후원자를 늘리고 돈을 만들어내는 일을 담당했었다. 인턴생에게 일을 시켰는데 컴퓨터가 후져서 일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며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나가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일주일간 보고 느낀 NGO를 글로 써오라고 했다. 두 장을 써왔는데, 그 두 장에 나의 모든 모습이 들어있었다. 매일 야근에 돈도 없고... 유일한 상사인 내가 컴퓨터 못 바꿔주겠나 하는 생각에, 열심히 인터넷을 뒤져 컴퓨터를 후원해주는 기업을 찾아냈다. 그 기업은 반크라는 곳인데컴퓨터 열 개를 줬다는 것을 알게 돼서 사회공헌팀에 전화했더니 마케팅팀을 소개해주었다. 어떻게 하면 컴퓨터를 받을 수 있냐고 묻자, 제안서를 써오라 했다. 처음 쓰는 제안서라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만들어 썼다. 결국 내가 쓴 제안서가 받아들여져 우리 회사가 기부를 받게 되었다. 당시 상황이 열악해서 인턴은 물론 직원들 대부분이 자기 컴퓨터를 가지고 와서 일했기 때문에 굉장히 뿌듯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느낌, 최고의 펀드레이징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모든 것이 책임감에 의한 것이었다. 열악한 곳에서 일하면서 뭔가를 얻어내거나 창조했을 때 가장 뿌듯했었다. 



구정은 쿠우 (사회적기업 ‘노리단 글로벌 마케팅팀)  연극동아리/문화예술경영/생협


경계인의 삶을 살아가며 기존의 경계에서 새로움을 창조하는 과정


현재 노리단이 국제적인 행사에서 초청받았을 때 공연팀의 모든 제반사항과 행사 전체를 코디네이팅을 하고, 마케팅 전략 짜는 것이 나의 일이다. 사회적 기업, 특히 문화예술 컨텐츠를 가진 곳의 마케팅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 자본이나 사회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다른 사회적 기업에게 어떤 모습 보여주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전략을 짜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노리단에 대한 이미지 메이킹, 네트워킹, 펀딩 등의 일을 한다.


M사 에서 사회적기업 노리단으로


 M으로 시작하는 외국계 컨설팅 회사 들어가서 서울에서 이년 반 뉴욕 본사에 서 일 년 금융 컨설팅을 하다가 현재는 사회적 기업 노리단에서 일하고 있다. 이전에 다녔던 회사에서는 말끔하게 정장을 갖춰입고, 출장 갈 때는 20대인데도 모범택시에 비즈니스 클래스를 태워주는 외국계회사였다. 반면에 노리단에서 일할 때는 바로 옆에서 공연연습을 하기도 하고, 트럭에 짐을 옮기는 막일도 한다. 이런 나의 행보가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것 같은데, 오히려 우리가 팍팍하게 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나는 단지 내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특별히 지금 선택이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 모두 인생수업이기 때문이다.


박진영 님이 얘기했듯이 나 또한 브로커, 경계인의 삶을 사는 것 같다. 때로는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이것저것 해보는 것이 좋다고 느낀다. 다른 섹터에서 일 해본 경험으로는, 제2섹터, 자본주의 옹호하는 곳에서도 배울게 많다는 것이다. 그곳은 역할이 명확한 만큼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 냉정할 수 있다. 그곳에서는 개인이 할 수 있는 것과 못하는 것을 오픈해서 진솔하게 얘기하고 쌍방향 피드백도 해준다. 나아가지 않으면 도태되는 곳이고 무한경쟁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라 무섭다면 무서울 수 있겠지만...


경계에서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


노리단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것은, 기업에나 국가에나 노리단은 인기가 많고 조직이 커지는데, 구성원들이 가진 다양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가 혼란스럽다. 이전 회사에서 배운 것과는 조직 내부의 논리가 다르다. 컨설팅분야에서는 말과 생각을 명료하게 하는 것을 가르친다. 대화할 때 서로의 의견을 못 알아듣는 이유가 서로 다른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전에 있던 회사에서는 사람들과 소통할 때 명징한 논리로 기본적인 가정부터 설득시켜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있는 노리단에서는 사회적 기업에 꿈과 희망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을 어떻게 조직화해야 하고 보듬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회사가 가진 장점을 살리되, 경계에서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은 무엇인지 많이 고민한다. 이전 회사의 논리에 익숙해졌다 생각했을 때 노리단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노리단에서 문제를 해결할 때 ‘우선순위를 생각해라’, ‘역할이 뭐냐’와 같은 이전 회사의 논리를 들이댔다. 그러면 사람들은 나중에 얘기하자고 한다. 생각해보면 노리단에는 우선순위와 전략이 없는게 아니라 근본적인 가치와 언어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임경진 지니(하자센터 기획부)  헤드헌터 / 창의 / 소셜 네트워킹


어딜 가든 커다란 구조나 체제의 조각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내가 있는 이 퍼즐의 전체적인 그림이 뭘까?

 

일본에서 헤드헌터로서 일하다가 현재는 하자 기획부에서 일하고 있다. 노리단이 동경에 와서 퍼레이드 행사를 했었는데, 그 뒤에 얼쩡거리면서 신나게 놀고 있는 나를 보고 조한혜정(노리단을 인큐베이팅 했던 하자센터의 센터장)이 관심을 가져왔고, 하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노리단이 하자의 일부라고 알고 있어서 노리단에서 일하고 있는 것인 줄 알았다.


계획 없이 살면 우연한 흐름이 있는 것 같은데 헤드헌터로서의 선택도 우연한 것이었다. 일본에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었을 때 알바를 하려고 구직자 싸이트에 공고를 올렸는데, 다음날 헤드헌터의 어시스턴트를 구하는 곳에서 연락이 왔다. 일하면 안 되는 비자였는데도 지원을 했던 당돌함이 높이 평가되어 일하게 되었다. 이 부서 저 부서 옮겨다니며 주 3일 인턴십 하다가 한 헤드헌터에게서 자기가 만들 회사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헤드헌팅은 논리를 적용하기보다는 사람을 다루는 일


쿠우가 섹터 간 논리의 차이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다는데, 나의 경우 서로 다른 섹터의 일을 해봤지만 그런 어려움은 별로 없었다. 헤드헌팅 일은 사람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회사나 일의 성격에 ‘논리’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헤드헌터로 일했던 사 년을 생각해보면, 나의 성격과 잘 맞았던 것 같은데, 바로 논리가 없다는 점, 사람을 대한다는 점에서 그런 것 같다. 일 자체가 사람과 세상에 대해 알게 되는 공부와 같았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기 때문에 논리를 들이대면 난리가 난다. 예컨대, 복리후생, 직급, 연봉 모두 나은 조건으로 완벽하게 협상개요를 짜가도 상대방은 거부를 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이해 가능한 대로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를 파고 들어가 보면, 너무 싫어하는 상사와 다시 만나게 된다거나, 반대로 현재 함께 일하고 있는 상사와 너무 애틋한 관계라거나 하는 비논리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지혜와 지식은 달라


또한 헤드헌팅 일이면 매우 똑똑한 사람들과 일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는다. 회사 안에 징크스가 있었는데, 최소 한 달에 한 번 이상의 또라이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이 똑똑하다는 얘길 어느 순간 안 하게 된다. 우리가 다룬 고객들이 바로 서브프라임의 주범들이기 때문이다. 연봉이 몇 억이고, 아이비리그 출신이고, 일 잘하는 사람들이라도 어이없는 부분에서 멍청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지혜와 지식은 다르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일을 때려치우고 싶었냐는 사회자의 질문이 있었는데, 4년간 헤드헌터 일을 하면서 힘들었던 순간 때문에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일은 다 힘들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보람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헤드헌팅 일을 그만둘 때에 사기업에 남아있을 생각이 없었다. 헤드헌터로 일할 때, 내가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자문하게 된 경험이 있었다. 사람을 뽑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결혼한 지 6개월 밖에 안 된, 너무 행복해 보이는 여성이 있었다. 굉장히 똑똑한 친구여서 선발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3개월 가르치고 난 후에는 이 사람이 실적을 내야 하는데 임신해버리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을 보면서 투자를 해도 그만큼 뽑아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너무 충격을 받았다.



대학교 다닐 때는 K. Marx 책도 안 읽었는데 서브프라임이 터지고 헤드헌터로 있으면서 자본주의 끝을 본 것 같다. 필요 이상으로 사람들은 해고 되었고 회사에서는 이 기회에 물갈이를 하는 것이었다. 여성일수록 회사를 나가야 했고, 미국인들을 대신해서 아시아에서 부당한 해고들이 일어났다. 나는 퍼즐의 한 조각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문제 되지는 않았다. 어딜 가든 커다란 구조나 체제의 조각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있는 이 퍼즐의 전체적인 그림이 뭘까 생각했을 때 그 전체적인 그림이 끔찍한 얼굴을 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6개월 정도 회사에 다니다 그만뒀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하자센터에서 인큐베이팅되고 있는 ‘노리단’과 ‘오요리’ 같은 사회적기업에게 필요한 네트워킹을 넓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또한 올해부터 할 프로젝트는 어떻게 하면 20대들이 일과 삶을 통해 세상과 자기 주도적이고 창의적으로 만날까를 고민하고 그 방법을 구상하는 것이다. 


*** 벼레별씨에서 뒷풀이, 새벽 5시까지 이어졌다는 후일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