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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11 마포univ/2011수업

FREE WRITING |글쓰기의 자유를 위한 시작(詩作) 리뷰

글쓰기의 자유를 위한 시작(詩作)


일시 : 11/9/29() 7:00 pm

장소 :타이포그라피 카페 공간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 86-30) 그라폴리오

참석 : 사마리아, 유기농, 베티블루, 중간, 소, 나무, 오렌지doll, 일찐, 몽상, 한량, 발꼬락, 해지, 꿈똥, 올리, 참주, 마음산책


시가 있는 공간에서 글쓰기의 자유를 위한 시작(詩作)을 시작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자유로 이끌어줄 사마리아


유기농 : 반가워요. 사마리아와 함께하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위한 시작' 수업은 8주간의 장기수업으로 진행됩니다. 이 공간 안에서는 우리가 그 전에 어떤 과거를 살았건 모두 청산해 드립니다(웃음) 자신을 소개하던 학교,전공,사는곳은 모두 잊어주세요. 그냥 있는 그대로, 현재의 존재하는 나대로 8주간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노트를 한권씩 나누어드릴게요. 앞으로 이 공백의 노트는 8주 후 한권의 시집으로 태어납니다. 


 

사마리아 : 첫 선물로, 현재 판매 중인 제 시집을 준비했어요. 또한 프로젝트의 번호가 붙은 프린트물은 오늘 수업용이에요. 8주 동안 저와 함께 '나의 책' 을 만드는거에요.노트가 자신의 책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근사한 내용과 구성을 걱정할 필요는 없고 생각나는대로 적으시면 돼요. 물론 생각나는 대로 쓰는 행위가 얼마나 많은 헛수고가 필요한지도 알게 되실 거에요 (웃음), 글쎄요, 자유란, 한마디로 헛수고가 아닐까요.

제가 오늘 수업에 올 때 강의에 대한 걱정은 그다지 하지 않았죠. 한 가지 걱정은 제 글쓰기 실력이 들통날까봐.(웃음) 왜냐하면 저는 유명 작가들처럼 유려한 문장이 술술 나오는 편이 아니에요. 저란 사람은, 여태껏 매일 매일 책상 앞에 몸을 던지며 허둥지둥 대는 존재이죠. 여러분과 저의 차이는 오직 저는 '나의 책'을 냈고 여러분들은 아직 여러분들의 책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뿐이거든요.

8주간 우리의 수업의 목표는 이 노트를 책으로 만들어 보는 거에요. 노트가 부족할 만큼 넘쳐나게 썼다면, 다른 종이에 써서 붙이시면 되구요 빽빽하게 채우고 싶지 않다면 그저 필요한 것만 쓰세요. 수업 시간에 시간을 제가 시간을 드릴 텐데, 아마도 1분 1초를 다투며 재빨리 쓰는 시간이 많을 거에요. ‘이 아닌 가능한 빨리, 우연히 떠오른 단어들을 놓치지 말고 기록하는 행위를 함께 진행하는 거에요. 가능한 한 정해진 시간 내에 빠르게 씁니다. 

미사여구를 탐하지 말아요. 형용사와 부사같은 수식어를 남발하지 않아요. 생각나는 대로 비상식적으로, 공격적으로 문법에 개의치 말고 써봐요. 수업 시간에 쓴 내용은 집에 돌아가셔서 다음 페이지에 다듬어 오세요. 수업을 진행할게요




-1. 첫인상 스케치

  5분을 드릴게요. 사마리아, 저에 대해 스케치를 해주세요. 전체적인 수업도 그렇고, 스케치 방향은 공격적인 글쓰기에요. 이 공간 안에서만큼은 문장을 완성하지 않아도 좋으니 자유롭게 써주세요. 짧은 시간 안에 내 안의 언어를 이끌어 내는 훈련이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혹은, 5분간의 메모가 나에게 긴 시간인가 짧은 시간인가 테스트 해보는 의미도 있지요.

이것은 직관의 훈련이기도 해요. 직관이란건 뭘까요. 예컨대 어떤 사람을 발견한 순간  내 머릿속을 휘젓는 수 많은 단어들이 있겠죠. 여태껏 우리는 그 휘젓는 단어들을 놓치고 살아왔단 말이죠. 그 단어들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이에요...자, 이제 돌아가면서 쓰기 한 것을 한번 읽어볼까요.

 

나무 : 사마리아는 누구일까. 왜 별명을 사마리아라고 했을까. 착한 사마리아 나쁜 사마리아 내가 두려워하는 인간이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닮았다. 왜 웃지않을까 심각한 사람이네. 글쓰기라는 말의 힘이 느껴진다.

 

한량 : 다크서클이 입까지. 잠을 잘 자지 못해 날카로운 길고양이 같다가도 준비를 꼼꼼이 해오는걸 보니 나쁘지 않은 사람 같고 정이 없진 않은 듯. 사랑이란게 받아본 놈이 준다고

 

꿈똥 :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색의 나무 탁자위에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그녀 주위 공기가 달라보인다.

 

베티블루 : 주인공은 나다. 슬픈 눈을 가졌지만 애인은 없다. 블랙을 탐하지만 푸른눈을 가졌다. 시작도 끝도 없다.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났을 뿐이다. 좋을 사람일 것도 같다. 딱히 뭐라고 정의하고 싶진 않다.

 

사마리아 : 잘 들었구요(한숨) 뭐야, 너무 잘 썼잖아! 자,  이제는 마주앉은 사람끼리 서로 스케치 하는거에요. 3분이에요. 자, 시작합니다. 너무 잘 쓰려 하지 마세요. 반칙이에요.


마음산책 : (유기농에 대해) 스텝인가보다 말하지 않고도 대화를 하는 표정. 반가우면서 한마디 건네고 싶다. 아직 잘 모르기에

 

사마리아 : (마음 산책의 말을 자르며), 여러분 제가 앞으로 원하는건 생각의 스텝, 생각의 발자국이에요. 완성된 문장은 수도 없이 써 봤잖아요. 우린 지금 바빠요, 바빠. 눈 / 인사/ 관계는 다 처음/ 왜 말하지 않지/ 배우 / 이효리/ 가을에/ 푸른 / 표정 /  과 같이 빠른 시간 안에 되도록 많은 단어들을 엇걸고 뒤섞어 쓰는 거에요

 

참주 : 와인색 안경테에 와인색 맨투맨을 입고 아직 순수함을 유지한 소녀처럼 보인다. 반쯤 남은 봉숭아색 손톱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사마리아 : 너무 잘 쓰셨어요. 그런데, 저는 폼 잡는 시인이라 남이 잘나가는 꼴을 못봐요. 참주, 과연 이게 자기가 지금 방금 생각해 낸 문장일까? 그럴까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 아니에요?


: 앞사람 시원시원보인다. 거침없을 것 같은. 빨간 가방 큰 눈. 모자가 잘 어울린다 부러워

 

해지 : 뽀안 얼굴에 뽀얀 얼굴이 잘 어울린다. 1930년대 영화의 주인공이 커피를 마셨던 장면 본적이 있는데 누군지는

 

사마리아 : 잘 쓰고 못 쓰고가 아니라, 우리에겐 지금 시간이 없다는 것이에요. 저기....첫눈에 반한 남자가 지나가는데 옷은 어떻다 안경은 어떻다 손톱이 어떻다, 느긋하게 설명할 수 있나요, 체크무늬/ 목젖/ 하얀 귀/ 까치머리/ 첫 눈에 그 남자를 내 눈동자에 새겨 버려야죠. 연필로 우물거리기도 모자르다면, 입으로 우물거리는 연습도 굉장히 필요해요. 마구마구 메모를 채우다 보면...나도 몰랐던 내 안의 단어들이 빵 터져나오는 거에요. 나는 지금 남자게 첫눈에 반했으니까요. 8주 동안은 지나가는 간판의 글자나 전단지의 광고 문구를 보면서도, 계속 입으로 웅얼거려 보세요

생각나는 대로 재빨리 기록하는 훈련을 반복하다보면,  다음 또, 그 또 다음의 단어가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오거든요. 인간은 두 다리가 있는데도 구태여 두 바퀴를 만들었어요. 인간의 상상력은 첫 번째의 시도를 언제나 몇 단계씩 뛰어 넘을 수 있어요. 걸어도 되는데 뛰어야 하고 뛰어도 되는데 바퀴를 굴리고 싶죠. 자기가 스스로 무언가 대단한 걸 쓴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만으로도 글쓰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요. 내가 아니라 펜이 쓴다고 생각하세요. 나보다 펜의 직관이 앞선다고 생각해 보세요. 

 

서로의 소개를 대충 했으니까요, 이제, 제가 어떻게 여러분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잠시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유기농'이 서점에서 제 책을 발견하고 저에게 컨택을 하여 이 수업을 마련 하게 되었는데요. 서로 먹고 사느라 이를 갈고 스펙을 위해 덤벼드는 이 바쁜 시대에 사마리아와 함께 하는 이 글쓰기의 자리에 오신 분들, 존경합니다. 강의를 한다고 했을 때 문학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이 소중한 두 시간을 메꾸어 나갈까, 걱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저는 시라고는 기형도와 이상과 김춘수의 시 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이렇게 글쓰기의 시작(詩作)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어요....아마도 저는 제가 처음 시를 쓰게 된 그 순간부터 운명적으로 이 강의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배우고 나서 쓰고 쓰고 나서 가르치고, 하는 단계는 이미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절차가 되었어요. 김연아도 피겨의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자신의 생애를 결정지을 피겨의 연기와 연출을 준비하고 있었을 거에요. 여러분도 이제 막 저와 함께 글쓰기의 詩昨을 시작하고 있지만, 이미 이 노트가 여러분의 책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출발하시기를 바래요.

 

앞으로 우리는 매일 한 페이지씩 글쓰기를 합니다. 멋진 문장을 탐하지 말고 생각나는대로 쓰는 연습이죠. 글쓰기와 시쓰기는 과연 다른 것일까요? 한 페이지의 글쓰기는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자기의 생각을 자기의 언어 질서로 구체화하는 것이에요. 이것이 시쓰기의 출발이죠. 저는 지금 글을 쓸 때 왜 시인의 작법이 필요한지를 말씀드리는 거에요. 한 페이지의 글쓰기는 마치 무인도에 고립된 사람이 생의 마지막으로 남기는 단어처럼 나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언어를 가장 절실한 방법으로 가장 절실한 전달력을 가진 단어들을, 마지막 유언처럼 기록하는 상황과 같은 거에요. 내 삶의 언어를 자유롭게 하기 위한 글쓰기를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이 時作은,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생의 마지막 순간을 어떤 행위로 마감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할거에요.

 

우리는 8주라는 시간 동안, 아마도 나는 왜 글쓰기의 강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지? 와 같은 글쓰기란 행위의 첫 시작 대해 자꾸만 의심을 품게 될 거에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질문과 질문들을, 가감없이 재빨리 기록하는 한 페이지의 글쓰기를 반복하다가, 지치고 또 지치면, 그 막바지 답답한 어느 순간이 되면 나도 모르게 내가 원했던 문장이 펑 터져요. 그 때 우리는 본격적으로 자유로운 글쓰기를 시작하는거에요. 저는 그것을 시쓰기를 통해서 체험했어요.


제가 그래서 이 <코끼리 과잉> 이란 시집을 만들게 됐습니다. 저는 완전한 문장을 목표로 쓰는 사람도 아니고 문장력을 겸비한 사상가도 아니에요. 하지만 마치 매일 아침 규칙적으로 근력 운동을 하는 사람처럼 매일 일정한 시간, 책상 위로 몸을 던져 한 페이지의 글쓰기를 해왔다는 점 만큼은 여러분에게 존중 받고 싶어요. 그런 저의 헛수고가 이 시집을 탄생시킨 것이죠. 이제 우리는 누군가의 글을 읽으면서, 누군가의 글을 평가하고 보편적 잣대로 상주고 벌주는 태도를 버려요.  내가 풍요로운 삶을 욕망하며 내일을 향해 달려갈 때, 그 누군가는 생활과 시간을 헛수고로 소모하며 책상 앞에서 한페이지의 글을 쓰고 있어요.

 

몽상 : 저는 헛수고의 존중이라는 선생님 말씀이 마음에 들어요. 비틀기가 익숙치않아서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했구요. 직접 쓰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문장을 비트는 의미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유기농 : 저는 예전에 선생님이 권하는 이런 방식으로 쓰기를 해 본적이 있는데 제가 가진 무의식의 크기라고 해서 제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고,  제가 제 글쓰기를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건 제 착각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베티블루 :단어를 다룰 때 의도적으로 혹은 순간적으로 다른 단어로 교체한다는걸 얘기해주셨잖아요. 저는 사실은 산문 이외의 글은 써보고 싶지도 않았어요. 시가 글의 시작이라는걸 인정하기에는 이 세상에 있는 시가 너무나 우리의 글쓰기의 현장과 벌어보여요. 선생님이 나누어 주신 선생님의 책을 폈는데 이 시가 선생님의 스타일이잖아요. 일단 읽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어요. 이 시집 안에서는 문장이 파괴될 수도 있고 문장을 파괴하는데에 스스로 자유로우신거잖아요. 그런데 과연 제가 제 글을 쓸 때도 마음껏 탈피해서 널뛰기처럼 해도 저에게 맞는 것인지....

 

사마리아 : 네, 됩니다. 다만, 단계가 있죠. 저는 그 단계를 통과한 사람이죠. 그 단계를 소개하고 싶은 것이죠. 이 노트 위에서, 한페이지 글쓰기를 하며 생각나는 대로, 혹은 생각 다음의 생각을 적어나가는 훈련이 탄탄히 이뤄지고 나면,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더 이상 생각의 지껄임에 연연하지 않게 돼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내가 하고 싶었던 결정적인 말들이 갑자기 뛰쳐 나오는거에요. 처음부터 뭔가를 의식적으로 형식적으로 채워나가게되면,그 어느 누구도 노트 한권을  채울 수 없어요. 노트 한 권 채우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요.

 

자동기술법에 대해 소개할게요. 1920년쯤대에 다다이즘운동으로부터 발생한 예술의 초현실주의 운동인 '받아쓰기' 방법인데요. 그 어떤 강요받은 의식의 억압에 반기를 들고 우연성에 의한 이미지를 극단적으로 자유롭게 늘어놓으면서 심리적 자유를 통한 정신세계의 해방을 얻고자 하는 기술법이죠. 물론 문학의 정통성에 위배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오래 가지는 못했어요. 자본 중심으로 유통되는 상품가치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만 지금의 초자본주의 시대에 반기를 드는 문화의 역동적 흐름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우리에게 이 자동기술법이야말로, 인간의 글쓰기에 주는 영향력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분위기에요.  

 

예를 들면, 제가 드린 책 중에 52페이지의 ‘통금(通禁) 이라는 시가 있어요. 시계를 옆에 두고 자동기술법으로 25분만에 쓰고서 다시 토닥토닥 다듬은거에요. 제 시에 대해 어색하게 생각하는 혹자들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 너무나 왜곡된 공백이 난무하다고 말해요.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 모범 답안 처럼 주어로부터 서술어에 이르기까지 형식적으로 파악하는 사람은 절대로 이렇게 쓰지 못해요.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쓸 용기가 없는 것이죠. (왜, 독자가 어색해하고 외면할 까봐) 독자를 유혹하는 문장의 남발이, 역설적으로 대형 서점에서조차 그 누구도 구경하지도 손도 대지도 않는, 독자로 하여금 주눅이 들게하는 글쓰기로 둔갑하고 있어요.

 

이 수업 시간에서만큼은, 예컨대, 명사에 당연히 뒤따라야 하는 조사를 거부하고,  뒤따라서는 안되는 형용사를 엉뚱히 넣어보자구요. 한 번 해보자구요. 이 수업 시간에서만큼은 누구도 우리의 문장을 함부로 평가하고 지시내릴 필요가 없잖아요. 왜,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읽는 사람이 편하게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문장을 써야만 하지요? 누구 좋으라고? 글쓰기의 자유는 글쓴이를 위한 것일까요, 읽는 사람을 위한 것일까요? 함부로 미사여구를 탐하지 말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미사여구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에요. 이 엉망진창인 시대가 우리에게 미사여구를 필요없게 만들고 있는데, 왜, 우리가 이 시대를 향해 구태여 멋진 문장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거죠? 한 페이지의 글쓰기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 대는 나의 연필이, 나의 문장 한 줄을 만들기 위해, 나의 자유, 나의 언어를 찾아가는 길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요? 가능한 한 내 안에 잠자고 있는 많은 어휘들을 찾아내서 펑 터뜨리기 까지의 한페이지 글쓰기는, 나에게 떠오르는 한 단어 한 단어가 과연, 진정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생각인가, 하며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을 해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죠.

 

이런 우리의 글쓰기의 자유를, 이 수업을 통해 8주동안 질러 보는거에요. 나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 속엔, 이런 헛수고, 이런 비틀기의 단계를 밟는 것이 필요해요. 전혀 상관없는 이미지와 이미지, 전혀 상관 없는 사물과 사물이 부딪히는거에요. 그 다음에 나올 단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한 페이지 글쓰기를 계속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와요. 그것이 바로, <제 3의 이미지> 에요. "받아들이는 것' 이지요. 직관은 누군가의 특별한 재능이 아니에요. 전혀 상관없는 문장과 문장을 배열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 안의 무언가를 터트리는 것이 창조성의 기초, 제 3의 이미지에요.

 

그런데, 이런 글쓰기는 겉보기엔 헛수고 같지만, 우리의 일터에서 벌어지는 아이디어 싸움과도 분명 관련이 있는거에요. 아무도 생각하지 않으려 외면하는 것을, 우리는 지금부터 생각할 수 있어요. 기존의 생활 방식도 이런 식으로 바꿔 보는 것도 좋아요.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내 주변의 사건들에 민감히 반응하며, 겸허히 받아 들이는 훈련. 이 수업에서는 엉터리들을 맘껏 늘어 놓아도 아무도 함부로 평가하지 않을 거에요. 내 안의 내가 몰랐던 단어들을 일깨우고 내 안의 단어들끼리 충돌시키는 훈련을 한번 해보기로 해요. 여기까지 들으셨을때 일찐은 어떠세요?

 

일찐 : 말씀하시는 것중에서, 음 어차피 사람은 자기의 마음에 드는 단어만 취해서 빈칸을 채우게 되잖아요.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과 나의 마음이 선택하는 단어와 단어들 사이에서, 그 간격을 얼만큼을 채우고 비워야할지가 어렵네요. 일종의 갭이 느껴지네요.

 

사마리아 : 다음 시간에 모방의 글쓰기를 할거에요. 일찐께서 지적하진, 바로, 그 단어와 단어 사이의 공백,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공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거에요. 시를 쓰는 사람들은 서로 부딪힌 단어와 단어, 서로 배열된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공백을 견디는 삶으로 사람들이에요. 공백을 견딘다...그 공백 사이에 무엇을 넣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이 8주에 고민해야할 것이에요.

한량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량 : 시인치고 말씀을 잘 하시네요 시인은 보통.. 네...음...

 

사마리아 :편견이에요

 

한량 : 편견을 깨려고 왔는데, 네 깨지네요.

 

사마리아 : 자동기술법에 의한 한페이지의 글쓰기는, 사실상, 글쓰기나 시쓰기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기존의 우리의 생활방식에 대한 성찰과도 같은 것이에요. 내가 지금 영위하고 있는 생활이, 과연, 내 안에서 비롯된 조형물인가? 와 같은 질문. 괴물 같아요. 세상이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의 조형물 말이에요. 그 어떤 직업을 갖고 계셔도, 일상 생활 속에서 우연히 터져나오는 여러 사건들과 사연들의 우발성에 대해, 도대체 이걸 어떤 형식으로 정리하고 기술하고 설명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실거에요. 평소 대화에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줄줄 늘어 놓다가 막히지요? 그럼 우리는 예를 들기 시작하죠. 그래도 생각이 안나면, 대화를 유도하죠,  그래도 이야기가 막혀요, 그러면 또다시 앞에 했던 말을 정리를 하죠. 뭔가 막히고 답답하면 그걸 견디지 못해서 거짓말도 하지요. 싫어도 소외될 까봐 남의 의견에 마구 박수쳐요. 그러나 글쓰는 자는, 시인은, 그리고 8주 동안의 우리는,  생각이 막힐 때 묵묵히 책상 앞에서 한 단어와 한 단어 사이 한 줄과 한 줄 사이, 그 공백을 견딥시다. 참고 참고 기다리던게 쌓이고 쌓일 때, 그 순간 터져 나오는거에요 어느 순간에.

 

저도 글쓰기를 하다가 막히는 순간이 너무나 많았고, 그것이 정도가 지나쳐 그만두려고도 했지요. 나는 왜 독자를 유혹하는, 폐부를 찌르는 문장을 가질 수 없을까, 엄청나게 좌절했어요. 글쓰기를 그만두려고 하는데 어떤 분이 저의 어떤 글에 댓글을 달았어요. ‘사마리아님 이 글 시같아요.’ 심지어 저는 시적인 감수성을 경멸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제 글을 읽어보니까, 정말 저도 몰랐었는데 제 글이 완전히 달라지고 있었어요. 제 글의 단어와 문장들의 배열이 저도 모르게 일그러져 있고 비틀어져 있는 거에요. 즉, 그 어떤 사람의 문장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이미 저 만의 언어 질서가 구축되어 있더군요. 제가 바로 그 다음 날부터 시를 썼어요. 솔직히....그게 시라고도 생각진 않았지만. (웃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지나가는 분의 그 댓글은 제게 망치로 얻어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어요.

 

만일 제가 제 글쓰기를 향해 가득히 만족에 차 있었다면 그 지나가는 분의 댓글이 눈에 들어오기나 했을까요? 아니에요. 좌절이라는 것, 방황이라는 것, 은 사람의 감수성을 아주 조밀하게 만들어주죠. 혁명은 주먹손으로 돌멩이를 던지는 행위만 일컫는 것이 아니에요. 행위라는건 솔직히....너무나 서서히 변해가는 거에요. 그 누구도 자기 행위를 내일 당장 바꿀 수는 없어요. 쇠고기를 입에 대지도 못하는 사람이, 오늘은 생선을 먹다가 내일 갑자기 스테이크를 하루 세끼 바로 먹을 수 있나요? 서서히 적응해가는 것이 행위죠. 물리적인 행위가 그렇단 말씀이에요. 그런데, 내일 당장이라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텍스트의 발견이에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첫번째 칼날은 우리가 사용하는 텍스트에요. 텍스트의 재발견, 재구성을 통해 서서히 나의 행위가 바뀌는거죠. 제가 왜 시를 쓰게 됐는지 다시 되돌아보면, 언젠가 부터 제가 쓰는 언어로는 타인과 소통이 안되는 거에요. 답답해 죽겠더라구요. 그런데.....제 언어가 시에 가깝다는 것을 그 때 안거죠. 저는 누군가의 폐부를 찌르는 문장을 탐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의 세계처럼, 나만의 언어질서를 확립하여 내 안의 언어가 어떻게 바뀌는지에 대해 살피고자 하는 사람이었던 거죠. 

시쓰기는, 글을 줄이는 함축의 기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언어와 타협하지 않는 내 안의 언어 질서에요.

 

나의 언어가 너무나 외로워서, 따돌림 받는 것 같아서 누구라도 좋으니 내 편으로 만들고 싶어서,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언어를 빌어다 훔쳐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언어는 타락하는 거에요. 그리고 급기야는, 서서히 나의 행위가 타락하는 거에요. 타락이 뭐 별 것인가요? 각성 없이 내 뱉는, 흉내내는 말투, 이것이 나의 행위마저도 타인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것이죠. 내 안에는 분명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나만의 언어의 세계가 있어요. 혁명적인 사고가 시작되는 첫 출발의 행위는, 그 누구의 강압과 추궁 앞에 휘둘리지 않기 위하여, 일분 일초를 헛수고하며 허둥대고 있는 나의 언어와의 싸움으로부터 시작(詩作)되지요...


자신을 돌아보는 수많은 단어, 시각, 편견, 나의 언어.. 많은 생각이 떠올랐던 시간.

다음주에 만나요